바티칸에 가면 누구나 먼저 성 베드로 대성전의 거대한 돔과 눈부신 제대에 시선을 빼앗기게 됩니다.
하지만 그 장엄한 공간 아래에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Vatican Grottoes, 바티칸 그로토입니다. 이곳은 성 베드로 대성전 아래층에 자리한 공간으로, 수많은 교황과 성인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매우 특별한 장소입니다. 공식 안내도 바티칸 그로토를 대성전 아래에 위치한 공간이며, 많은 교황과 성인들의 무덤, 그리고 성 베드로의 무덤과 연결된 장소로 설명합니다.
바티칸 그로토(Vatican Grottoes)
저는 처음에 이곳이 스카비(Scavi) 투어와 같은 곳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릅니다. 바티칸 그로토는 일반 방문객에게 공개된 구역이고, 무료로 방문할 수 있습니다. 반면 스카비 투어는 그보다 더 아래에 있는 바티칸 네크로폴리스로 내려가는 별도 예약 가이드 투어입니다. 공식 FAQ에서도 두 공간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며, 네크로폴리스는 사전 예약과 가이드 동행이 필요한 반면, 바티칸 그로토는 자유 방문이 가능한 구역으로 안내합니다.
바티칸 그로토에 들어서면, 위층 대성전의 화려함과는 다른 공기가 느껴집니다.


교황들의 무덤과 기념 공간들
복도처럼 이어지는 공간을 따라 걷다 보면 교황들의 무덤과 기념 공간들이 차분하게 이어지고, 발걸음도 저절로 조심스러워집니다. 공식 설명에 따르면 바티칸 그로토는 르네상스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바닥을 지탱하기 위해 1590년부터 1591년 사이 조성된 아치형 구조 위에 형성된 공간이며, 그 기원은 더 오래된 설계 변화에까지 닿아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은 단순한 지하실이 아니라, 대성전의 역사와 기억을 떠받치고 있는 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성 베드로와의 연결성 때문일 것입니다.
공식 안내는 바티칸 그로토가 성 베드로의 무덤을 포함한 장소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독립된 무덤 하나를 가까이에서 “관람”하는 느낌이라기보다, 성 베드로 대성전의 가장 깊은 기억과 전통이 머무는 아래층 공간을 걷는 경험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이 화려한 감탄을 불러오는 장소라기보다,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게 하는 장소로 더 오래 남았습니다.

바티칸 그로토에는 성 베드로 이후의 초기 교황들이 순서대로 묻혀 있는 것은 아니다. 2대 성 리노, 3대 성 아나클레토, 4대 성 클레멘스 1세, 5대 성 에바리스토는 전승상 성 베드로 가까이에 묻혔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 그로토에서 개별 무덤으로 확실히 확인되어 보이는 것은 아니다. 현재 그로토에서 이름과 위치가 비교적 분명하게 표시되는 이른 시기의 교황 무덤으로는 10세기 말의 교황 그레고리오 5세가 있다. 그래서 그로토는 ‘초기 교황들의 연속된 무덤길’이라기보다, 성 베드로의 기억을 중심으로 여러 시대의 교황 무덤과 고대 유구가 겹쳐 있는 지하 공간에 가깝다.






성 베드로 다음의 교황, 성 리노는 어디에 잠들었을까
가톨릭 전승에서 초대 교황은 성 베드로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뒤를 이은 제2대 교황은 성 리노입니다. 성 리노는 베드로 사도의 뒤를 이어 초기 로마 교회를 이끈 인물로 전해집니다.
바티칸 그로토와 스카비 투어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성 리노의 무덤도 이곳에 있을까?”
전승에 따르면 성 리노는 성 베드로 가까이, 바티칸 언덕에 묻혔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오늘날 바티칸 그로토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교황 무덤들처럼, “여기가 성 리노의 무덤입니다”라고 확실하게 확인되어 전시되는 무덤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 리노의 무덤은 신앙의 전승 속에서는 성 베드로 곁에 머물지만, 역사적·고고학적으로는 뚜렷하게 확인된 장소로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성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저는 보이는 무덤보다 보이지 않는 초기 교회의 기억을 더 오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3대 교황 성 아나클레토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성 베드로와 성 리노의 뒤를 이은 제3대 교황은 성 아나클레토, 또는 성 클레토로 전해집니다. 그는 초기 로마 교회를 이끈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승에 따르면 성 베드로 가까이 바티칸 언덕에 묻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바티칸 그로토에서 우리가 보는 교황 무덤들처럼, “여기가 성 아나클레토의 무덤입니다”라고 확실하게 확인되어 전시되는 개별 무덤은 아닙니다. 그의 무덤은 성 베드로 무덤 가까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고고학적으로는 분명하게 입증되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로토와 스카비 투어를 걸을 때, 성 아나클레토의 이름은 눈앞의 무덤보다 초기 교회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더 조용히 다가옵니다.
제4대 교황 성 클레멘스 1세의 무덤은 그로토에 있을까
성 베드로, 성 리노, 성 아나클레토의 뒤를 이은 제4대 교황은 성 클레멘스 1세로 전해집니다. 그는 초기 로마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며, 훗날 로마의 산 클레멘테 성당과 깊이 연결된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티칸 그로토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교황 무덤들처럼, “여기가 제4대 교황 성 클레멘스 1세의 무덤입니다”라고 확실하게 확인되는 무덤은 없습니다. 초기 교황들의 무덤은 전승 속에서 성 베드로 가까이에 머물지만, 오늘날 그 위치가 모두 분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로토를 걷는 일은 단지 보이는 무덤을 보는 시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초기 교회의 기억을 더듬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제5대 교황 성 에바리스토의 무덤은 그로토에 있을까
성 베드로, 성 리노, 성 아나클레토, 성 클레멘스 1세의 뒤를 이은 제5대 교황은 성 에바리스토입니다. 그는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 로마 교회를 이끈 인물로 전해집니다.
전승에 따르면 성 에바리스토는 성 베드로 무덤 가까이, 바티칸 묘지에 묻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바티칸 그로토에서 “성 에바리스토의 무덤”으로 확실하게 확인되어 전시되는 개별 무덤은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황들의 이름은 그로토의 대리석 무덤보다, 성 베드로 가까이에 머물렀다는 오래된 전승 속에서 더 조용히 다가옵니다.
바티칸 그로토는 입장 방식
바티칸 그로토는 입장 방식도 비교적 단순합니다.
공식 안내에 따르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방문할 수 있으며,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 하나, 바티칸 그로토는 가이드 투어 구역이 아닙니다. 공식 페이지에는 “가이드 투어는 요청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설명을 들으며 이동하는 투어형 공간이 아니라, 각자가 천천히 걸으며 묘역과 기도 공간을 마주하는 장소라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그래서 바티칸 그로토는 스카비 투어의 “포함물”이라기보다, 별개의 공개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스카비 투어를 마친 뒤 대성전 안에서 이어서 내려가거나, 일반 성 베드로 대성전 방문 동선 속에서 따로 찾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운영 방식 자체는 완전히 다릅니다. 네크로폴리스는 소규모 예약 가이드 투어로만 방문 가능하고, 바티칸 그로토는 무료 공개 구역입니다.
제가 느끼기에 바티칸 그로토의 가장 큰 매력은 “아래로 내려간다”는 데 있었습니다.
돔 위로 올라가는 경험이 바티칸의 웅장함을 보여준다면, 그로토로 내려가는 경험은 그 웅장함 아래 놓인 시간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위에서는 찬란한 빛과 대리석을 보게 되고, 아래에서는 침묵과 기억을 만나게 됩니다. 바티칸을 겉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 쌓인 역사와 신앙의 층을 함께 느끼고 싶다면 이 공간은 꼭 들러볼 만합니다. 성 베드로 대성전 공식 안내도 대성전 방문 시간에 그로토 관람 시간을 따로 더해야 한다고 안내하고 있을 만큼, 이곳은 하나의 부속 공간이 아니라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 장소입니다.
바티칸 그로토는 화려한 명소를 기대하고 가는 곳은 아닙니다.
오히려 조용한 묘역, 교황들의 무덤, 성 베드로와 이어지는 전통, 그리고 대성전 아래 감춰진 침묵의 시간을 만나고 싶은 분께 더 어울립니다. 저에게 이곳은 “또 하나의 관광 코스”가 아니라, 성 베드로 대성전이 왜 그 자리에 세워졌는지를 마음으로 조금 더 가까이 느끼게 해준 장소였습니다.

마무리하자면, 바티칸 그로토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아래층에 숨겨진 조용한 세계입니다.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이곳을 천천히 걸어본 사람이라면 바티칸의 인상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가장 높은 돔이 아니라, 가장 낮은 층에서 오히려 더 깊은 시간과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별이 된 어머니를 향한 순례길에서 – 소공녀의 별
On a pilgrimage path towards my mother, now a star
– Little 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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